[서른 살 BIFF] ① 낯선 시선 속 황소처럼 걸어온 첫 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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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불모지' 부산서 출발한 국제영화제…우려에서 호평으로
'다이빙벨 사태'로 맞은 위기에 영화인 "독립성과 자율성 보장"
[※ 편집자 주 =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올해로 서른 살을 맞았습니다. 한국 영화계의 새로운 얼굴을 발굴하고, 아시아 영화의 교류 무대를 넓혀온 BIFF는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연합뉴스는 지난 30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 BIFF가 걸어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기획기사 5편을 송고합니다.]
(부산=연합뉴스) 박성제 기자 = 부산국제영화제는 1996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영화제로 출발했다.
문화 불모지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던 부산에서 영화제가 출범한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낯설고 불안한 시선이 적지 않았다.
이후 반복되는 상영작 논란에 영화제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30년을 맞는 지금, 부산은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만남의 장이자 아시아 영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 낯선 시선 속에 출발한 우리나라 첫 국제영화제
부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영화제를 하자고 했을 때 모두가 의문을 표했다.
우리나라 문화의 중심은 늘 서울이었고, 영화의 중심은 충무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국제영화제를 열자는 논의는 항상 탁상공론에 머물렀고, 그러는 사이 부산에서 영화제를 만드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용관 경성대 교수, 김지석 부산예술대학 교수, 전양준 영화평론가 등이 부산지역의 영화계 인사와 정계, 재계 인사를 불러 모아 영화제 개최의 필요성을 알렸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준비와 맞물렸다.
이들의 호응을 얻어낸 영화제 준비팀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아시아 영화 중심의 비경쟁 영화제라는 기본 성격을 확정했다. 이어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부산에서 영화제를 열자는 논의가 시작된 지 2년 만인 1996년 9월 13일.
부산 수영만 야외극장에서 '비밀과 거짓말'을 개막작으로 한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영화제는 처음부터 해외 유수의 해외 영화제와 달랐다.
남포동 비프(BIFF) 광장을 가득 메운 관객 대부분은 10∼20대였는데, 유명 해외 영화제의 주요 관객들이 중장년층인 것과 대조적이었다.
당시 칸과 베를린 등 해외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비롯해 외신 기자들은 이 낯선 풍경에 '젊은 영화제'라면서 "영화제의 희망이 보인다"는 평을 남겼다.
부산이 바다를 끼고 있는 덕에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현장도 연출됐다.
한때 해운대 바닷가에 일렬로 늘어서 '코리안 펍'이라고 불리던 포장마차는 외국인은 물론 타지에 사는 내국인에게도 이색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당시 영화를 사랑한다면 누구나 이 자리에 껴 언어와 국적을 뛰어넘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의 주 무대도 조금씩 변해왔다.
1996년 제1회 영화제의 개막식이 열렸던 수영만 요트경기장은 한동안 부산의 바다를 배경으로 한 야외 상영이 펼쳐지며 영화제의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1년 영화제 전용관이자 영상 복합문화공간인 영화의전당이 개관하면서부터 영화제의 중심 무대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과거의 야외 상영을 기억하듯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이 더 넓은 좌석 등 쾌적한 관람 환경 속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굴곡의 영화제…반복되는 검열에 상영작 논란까지
영화제가 30년 동안 이어온 여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사실상 검열이나 다름없는 당국의 심의는 고질병같이 따라다녔다.
정부 당국이 문화예술 등 민간 분야를 지원할 때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두어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팔길이 원칙'은 영화제에서 언제나 화두였다.
영화제 초반, 당시 출품하는 작품은 모두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추구하는 '독립성'과 '자율성'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영화제는 심사위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거나, 일부러 모든 공문서에 되도록 늦게 회신하는 식으로 대응했는데 결국 심의위원이 부산의 여관방에 출품용 비디오를 쌓아놓고 심의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부산국제영화제 관계자는 "영화제 직원이 문제가 있겠다 싶은 작품들은 멀리 떨어뜨려 놓고 노출 장면이 등장하면 시선을 딴 곳에 돌리게 하는 수법을 사용했다"며 "당시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구속되겠다며 강력하게 대응해 사전 심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던 검열의 압력을 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영화제마다 제한 상영 등 크고 작은 헤프닝이 있었지만 가장 큰 파동은 2014년 다이빙벨 사태 때였다.
영화제는 부산시장이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당시 부산시가 세월호 구조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 상영을 반대했다.
부산시의 요청을 당시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거부하면서 영화는 계획대로 상영됐다.
그러나 영화제가 끝난 뒤 느닷없이 부산시 감사에 이어 감사원 감사, 이용관 집행위원장에 대한 검찰 고발 등이 잇따랐고 한해 15억원에 이르던 국비 지원도 그다음 해 8억원으로 반토막 났다.
영화계 관계자는 "자율성과 다양성을 구가하던 홍콩 영화계는 1997년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뒤 하락세를 이어갔고 현재 홍콩영화제는 더욱 많은 제약을 받아 힘을 잃은 상태"라며 "부산영화제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BIFF 성공은 기폭제…전국 각지에 영화제
위기 속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가 한국 문화계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은 지역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줬다.
전국 각지에서 국제영화제가 속속 등장하며 문화의 외연을 넓히고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9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가 출범한 데 이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강릉국제영화제가 잇따라 등장했다.
부산 또한 '영화의 도시'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영화와 관련된 각종 행사와 국제 교류의 중심지가 됐다.
특히 영화 촬영을 지원하는 영상위원회가 설립되면서 국내외 제작사들이 부산을 찾기 시작했다.
이는 숙박·교통·관광 산업으로 이어져 지역 경제 전반에 막대한 파급 효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