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촌극의 연속, 우린 배우이자 관객…영화 '수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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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 신작…로카르노 최우수연기상 김민희 연기 돋보여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너는 하나도 안 변했다. 애 같아."
"무슨 소리세요. 저 마흔 살 넘었어요."
홍상수 감독의 서른두번째 장편 영화 '수유천'은 중년 남자 시언(권해효 분)과 젊은 여자 전임(김민희)의 반가운 듯 어색한 재회 장면으로 시작한다.
둘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다. 여대에서 강사로 일하는 전임이 배우 겸 연출가인 외삼촌 시언에게 학교 촌극제의 연출을 부탁하면서 오랜만에 만나게 된 것.
시골에서 책방을 하며 유유자적하던 시언이 전임의 부탁을 들어준 이유는 40년 전 이 대학에서 촌극을 연출했던 추억이 떠올라서다.
그는 전임의 제자들과 열심히 촌극을 준비해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혹평이 쏟아지고, 전임은 총장의 호출을 받고 해명하는 자리까지 불려 간다.
이 촌극은 말 그대로 완전히 망했지만, 관객은 '수유천'에 나오는 수많은 촌극을 마주하며 웃음을 참을 수 없을 듯하다. 시언이 공들여 짠 극본보다 그와 전임에게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이 더 극적이고 실소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시언의 오랜 팬이라는 정교수(조윤희)는 초면에 난데없이 그에게 장어를 권하며 수작을 건다. 학생들과 문어발식 연애를 한 게 들통나 연출직에서 잘린 한 남자는 늦은 밤 학교를 찾아 연애 상대였던 학생 하나에게 청혼한다. 시언은 자기보다 마흔 살 어린 여대생들과 술을 마시다 감정에 취해 눈물을 흘린다.
전임은 마치 관객처럼 이들을 지켜보거나 때로는 배우처럼 사건에 개입한다.
하지만 그 역시 사회의 '역할 놀이'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하늘 같은 정교수와 함께 있을 때면 진심과 아부가 반씩 섞인 듯한 말을 늘어놓는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사실적인 등장인물과 우리 주변 어디서 본 듯한 스토리 덕분에 이 작품은 홍 감독이 최근 내놓은 영화 중 가장 유머러스하게 느껴진다. 홍 감독의 장기인 생생한 술자리 묘사와 번지르르한 겉모습과는 달리 찌질하기 그지없는 남자 캐릭터도 반갑다.
이 영화에는 홍 감독과 그의 연인 김민희의 상황을 암시하는 듯한 설정과 대사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특히 전임이 하는 말에는 김민희가 지난 8년간 느꼈을 법한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김민희는 홍 감독과 연인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진 2016년 이후 홍 감독의 작품에만 출연했다. '홍상수 세계에 갇힌 배우'라는 평이 늘 따라다니는 이유다.
그러나 김민희는 이 좁은 세계에서 오히려 더 자유로워 보인다. 그는 '수유천'에서 한 가지 재킷만 입고 등장한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카락에는 새치가 섞여 있고, 주름이나 다크서클도 가리지 않는다. 연기 역시 다른 사람을 가장하는 게 아니라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극 중 전임이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느라 불행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장면은 김민희가 상업 영화계에서 스타 배우로 살았던 과거를 되짚는 것처럼 느껴진다. 팬들에겐 아까운 배우일지 몰라도, 정작 자기 자신은 평안을 찾은 지 오래인 듯하다.
그는 '수유천'으로 제77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자리에서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준 감독님, 당신의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영화제 측은 김민희에 대해 "섬세함과 인내, 절제를 위한 대담함은 물론 그 이상의 훨씬 더 많은 것을 해내 심사위원단 모두를 경탄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18일 개봉. 111분.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