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거짓의 흐릿한 경계에서 벌이는 줄타기…영화 '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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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사고사로 조작하는 사람들 그린 스릴러…강동원 주연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모든 사건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다른 내막을 감추고 있고, 여기엔 누군가의 음모가 개입하기도 한다.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려는 사람은 음모가 깔려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지만, 음모론에 빠지는 건 위험하다.
하나의 가설일 뿐인 음모론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이성적 판단과는 점점 멀어진다. 인류 역사의 모든 굵직한 사건이 막후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비밀단체의 음모라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음모론에 휘둘리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하고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음모론이 쉽게 힘을 떨친다.
이요섭 감독의 신작 '설계자'는 우리 시대의 이런 풍경을 서늘한 색조로 그려낸 스릴러다.
주인공 영일(강동원 분)은 어두운 음모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그는 살인 청부를 받아 사람을 죽이고는 우연한 사고로 위장하는 작업을 전문적으로 수행한다.
사람을 살해하고도 법망을 빠져나가는 음모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게 영일의 직업인 셈이다. 그는 재키(이미숙), 월천(이현욱), 점만(탕준상) 등 동료 셋과 팀을 이뤄 작업한다.
영일에겐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이 하나 있다. 옛 동료 짝눈(이종석)이 당한 의문의 죽음이다. 영일은 이 사건이 자기 팀보다 훨씬 큰 비밀 조직인 '청소부'의 음모라고 확신한다.
영일이 유력 인사를 해치워달라는 요청을 받아 작업에 착수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 잇달아 벌어지면서 영일은 또 다른 음모가 자기를 조준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영일에게 살인 청부를 한 영선(정은채)과 보험사 직원 치현(이무생)은 영일을 점점 미궁으로 끌어들인다.
강동원은 완벽한 음모를 설계하는 전문가가 음모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면서 마침내는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스크린에 실감 나게 그려낸다.
'검은 사제들'(2015), '검사외전'(2016),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2023) 등에서 어딘가 가볍고 코믹한 요소를 보여준 것과는 사뭇 다른 연기를 선보인다. '설계자'의 강동원은 시종 차갑고 어두운 표정이고, 그의 이런 얼굴은 극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워진 시대상을 반영한 이 영화는 영일의 정신을 지배하는 음모가 사실인지 환상인지는 의문으로 남겨 둔다.
극히 낮은 확률의 우연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극 중 사건들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영일의 마음속에 그려진 사건일 수도 있어 딱 잘라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 감독이 연출한 두 번째 장편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 '범죄의 여왕'(2016)은 고시생이 수도 요금 폭탄을 맞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일상적인 소재에서 스릴을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설계자'는 홍콩 영화 '엑시던트'(2009)의 리메이크작이다. 살인 사건을 단순 사고사로 위장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기본 설정은 같지만, 음모론을 퍼뜨리는 유튜버 등을 등장시켜 지금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이 감독은 23일 시사회에서 "우리가 뭔가를 알아내려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진실에 도달할 수 없어 무기력과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며 "진실을 찾는 주인공의 혼란과 혼돈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29일 개봉. 99분.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