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eople] 박호산 "마흔에 이름 바꾸고 인생도 확 바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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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꿈에서 불린 조부 함자를 예명으로…본명은 박정환"
"이해력이 곧 연기력…배역을 '친구' 삼아 친해지도록 노력"
"매년 한 작품은 제대로 무대에…연극상 받으면 많이 울 것"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배우 박호산이 1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호산은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을 맞아 열리는 연극 '오셀로'에서 주역 '오셀로'로 무대에 오른다. 2023.4.12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김지선 기자 = "꿈에 어떤 할아버지가 나타나 저를 박호산이라고 부르면서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라고 호통치더군요. 딱 마흔살 때 이름을 바꾸고 인생도 확 바뀌었죠"
본명이 박정환인 배우 박호산(52)은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012년 당시 하도 인지도가 없어서 이름을 '지도'라고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며 예명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다.
불혹의 그에게 깨달음의 전기를 마련해준 '박호산'은 사실 조부(祖父)의 함자. 그만큼 어깨도 무거워졌다.
박호산은 "고독한 예술가 역을 줄줄이 맡으면서 심한 우울감이 찾아왔고 나 자신조차 '참 못됐다'고 생각할 만큼 말로 남들에게 상처를 줬다"며 "후회와 반성을 통해 마음가짐을 바꿔서인지 얼굴이 부드러워졌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열린 2023 예술의전당 토월정통연극 '오셀로'프레스콜에서 배우 박호산이 주요 장면 시연을 하고 있다. 2023.5.18 [email protected]
지난 1996년 뮤지컬 '겨울 나그네'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300편이 넘는 연극·뮤지컬에 출연한 그는 '대학로 장승'이라는 별명처럼 공연계를 묵묵히 지켜왔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나의 아저씨' 등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후에도 "매년 최소 하나씩은 제대로 연습해서 무대에 올리자"는 것이 그의 신조. 올해에만 연극 '아트', 낭독극 '모두가 나의 아들' 등 세 작품을 필모그래피에 추가했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 드라마가 작가의 예술이라면 무대는 배우의 예술이라는 지론을 가진 박호산이 첫 번째로 꼽은 연극의 매력은 '관객'이다.
박호산은 "그날그날 새로운 손님과 호흡하기에 무대는 '살아있는 유기체'"라며 "객석의 흐름을 그대로 느끼면서,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그 공기를 매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대연기는 연습 기간 동안 시간을 두고 캐릭터를 다듬어나갈 수 있지만, 매체연기는 첫 촬영을 마치면 계속 그 캐릭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느끼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하지만 연기는 표현하는 장르가 아닌 이해하는 장르이며, 이해력이 곧 연기력이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배역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계속 친해지려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나와 그 인물의 중간쯤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 박호산이 귀띔한 '꿀팁'이다.
그에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조연상을 안겨준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문래동 카이스트'는 그렇게 쌓은 내공이 탄생시킨 '인생 캐릭터'인 셈이다.
박호산은 "연극인끼리 모여서 '이 드라마가 잘 안되면 대학로 배우 밥줄 끊는 거다'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며 "연극할 때처럼 다들 똘똘 뭉쳐서 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스스로 '작품 복 있다'고 말하는 그조차 '침을 뚝뚝 흘릴 만큼' 탐냈던 역할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이병헌이 선보였던 트럭 만물상.
박호산은 "눈물을 흘리며 보다가도 질투가 났다"며 "물론 이병헌 선배가 너무 잘했지만 '이건 좀 이렇게 했으면', '내가 하면 어땠을까' 이런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 수현재씨어터에서 열린 연극 '얼음'의 프레스콜에서 배우 박호산이 연극을 시연하고 있다. 2016.2.17 [email protected]
KBS 2TV '불후의 명곡'에서 우승할 만큼 출중한 노래 실력을 자랑하는 그의 원래 꿈은 '통키타 가수'였다. 우연히 대학로 마로니에 극장에서 본 연출가 기국서의 '햄릿4'가 중학교 3학년생을 연기자의 길로 이끌었다.
박호산은 "바닥에 동그란 조명이 비추고 햄릿이 나와서 '죽느냐 사느냐' 대사를 하는데 가슴이 왜 그리 쿵쾅쿵쾅 뛰든지 정말 멋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극단 연우무대를 통해 연기를 시작한 이후에도 '연극쟁이'들이 그렇듯 그에게도 배고픈 시절은 길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 중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기에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생활고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박호산은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 한잔하다가 막차를 놓치면 조정실에서 자거나 새벽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며 "그래도 그게 다 즐거웠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나의 아저씨' 속 아지트였던 정희네 술집의 소품용 술을 나눠 마시고 찍었던 노래방신 역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이제 연기 인생 30년을 앞둔 박호산의 소망은 배우 에드워드 노턴이 열연한 영화 '프라이멀 피어'의 엔딩신처럼 명장면으로 기억되는 것. 그는 "백상예술대상 때도 안 울었는데, 연극상을 받는 날에는 많이 울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