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할리우드 대작도 해봤지만 '오겜' 같은 환대는 처음"

(서울=연합뉴스) 오명언 기자 = 국내 연기파 배우를 논할 때면 늘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배우 이병헌의 연기 내공은 디테일에 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에서도 그는 찰나의 표정과 눈빛으로 감정을 전한다.

게임을 끝내겠다며 무턱대고 덤비는 성기훈(이정재 분)을 바라보는 두 눈에는 호기심과 적의, 비웃음과 경멸이 담겨있지만, 이따금 안타까운 듯한 마음도 엿보인다. 알 듯 모르겠는 복잡미묘한 그의 표정들이 시선을 붙들며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8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저와 시청자들만 아는 비밀을 은밀하게 건드리는 듯한 느낌으로 연기했다"고 떠올렸다.

이병헌은 '오징어 게임2'에서 정체를 숨기고 게임에 잠입한 프론트맨을 연기했다. 001번인 '오영일'이란 이름으로 참가자들과 어울리며 성기훈의 신뢰를 얻는다.

이병헌은 "오영일의 정체는 오영일과 그를 지켜보는 시청자들만 알고 있지 않으냐"며 "우리끼리만의 비밀인 것처럼 미묘한 느낌을 주는 게 보는 입장에서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시즌1에서 오일남 캐릭터의 정체를 내내 숨기다가 후반부에 큰 반전으로 활용했다면, 이번에는 아예 반대되는 전략을 택한 것이죠. 모두가 아는 프론트맨을 게임에 넣어서 꾸준한 긴장감을 주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게임의 현장 최고 관리자 역할을 맡고 있는 프론트맨의 본명은 황인호다. 성기훈과 마찬가지로 게임에 참가했던 우승자 출신이다.

이병헌은 "황인호는 이미 삶의 희망을 모두 잃어버린 상황에서 게임에 참여했다가 우승하는데, 게임에서 인간의 밑바닥을 보게 되고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다"며 "비관의 끝을 달리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성기훈과 프론트맨은 같은 우승자이지만, 게임을 바라보는 관점이 극명하게 갈린다. 성기훈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걸고 다시 게임에 참가했다면, 프론트맨은 게임을 지켜내기 위해 다시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는다.

이병헌은 "프론트맨은 기본적으로 '잘 봐. 네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지'라는 생각을 갖고 성기훈을 바라보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는 그를 은근히 응원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짚었다.

그는 "프론트맨은 성기훈에게 과거 본인의 모습을 비춰봤을 것"이라며 "그런 측면에서 성기훈이 주장하는 신념이 맞기를 바라는 마음도 어쩌면 있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프론트맨으로 일하는 이유에 관해서도 많이 물어보시더라고요. 그 이유는 정말 세상에 대한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이에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서 그 섬에 남은 것이지, 그곳에 남고 싶어서 남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징어 게임2'는 국내외에서 혹평과 호평이 엇갈리지만, 넷플릭스 콘텐츠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은 시청 시간과 시청 수를 기록하며 2주 연속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본 콘텐츠로 집계됐다.

이병헌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며 "어떤 작품이든 혹평이 없을 수는 없으니 주관적인 생각도 존중한다"고 말했다.

이병헌은 평소 친분이 있는 그룹 빅뱅 출신 탑(최승현)을 극 중 타노스 역에 추천해 캐스팅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그는 "(탑을 캐스팅하려고 한다는) 감독님의 생각을 전해 듣고서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며 "당시에는 (관여) 의혹과 관련해서 굳이 따로 입장을 밝힐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했다.

1991년 데뷔한 이병헌은 배우로만 34년을 살아왔다. 일찍부터 할리우드 대작 '지.아이. 조', '레드: 더 레전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등에 출연했지만 이번 같은 해외 반응은 처음이라고 한다.

이병헌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몇 번 경험했는데 이렇게 한국어 연기로 한국 동료들과 해외에서 환대받는 것은 느낌이 아예 다르다"며 "할리우드 작품보다 한국 작품으로 더 큰 환영을 받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감개무량하다"고 웃음 지었다.

"배우로서 이상적인 삶은 어디서든 적당히 얼굴을 알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아이. 조'를 찍고 나서 '이제 난 적당히 유명한 삶과는 거리가 멀겠구나, 아주 유명해지겠구나'라고 생각했죠. 이후로도 몇 번을 그렇게 생각했는데, 해외에 가면 늘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웃음) 근데 이번에는 진짜인 것 같아요. 당분간 모두에게 알려진 사람으로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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