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죽음 반복하며 일하는 미키, 노동자 현실과 닮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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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SF 영화 '미키 17'…"독재자 저격, 트럼프 피습 후 재촬영 아냐"
"신작 때마다 죽었다 깨어나는 느낌…8번째 찍어 '봉 8' 상태"
"SF, 현실 적나라하게 드러내"…"휴대전화 안 보게 되는 영화 만들 것"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세계적인 거장 봉준호(56) 감독이 첫 할리우드영화 '미키 17'을 들고 돌아왔다.
봉 감독의 8번째 장편 영화이자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등을 휩쓴 '기생충'(2019)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얼음 행성 개척에 투입돼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으면 복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남자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를 주인공으로 한다. 17번째 미키인 미키 17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18번째 미키가 출력돼 나오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제가 지금 '봉(준호) 8' 상태입니다. 새 영화를 찍을 때마다 온몸이 갈려 나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느낌이거든요. 영화에서 미키가 여러 번 죽어도 매번 무섭고 싫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저도 비슷합니다. 개봉 때면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해요."
지난 19일 콘래드호텔서울에서 만난 봉 감독은 신작을 내놓는 소감을 묻는 말에 영화 주인공 미키의 처지에 비유해 답했다.
그는 "영화 규모와는 상관없이 흥행에 대한 부담은 늘 따라다닌다"고 했다.
'미키 17'은 봉 감독이 처음으로 도전한 우주 배경의 SF물로, 그가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 중 최다 제작비인 1억1천800만달러(약 1천700억원)가 들어간 블록버스터다. 넷플릭스 자본을 끌어온 '옥자'(2017) 제작비(5천만달러)의 두 배가 훌쩍 넘는다.
봉 감독은 그러나 "(투자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에서 설정한 예산은 1억2천만달러였다"며 "스토리보드대로 정확하게 찍고 재촬영 없이 일정 안에 순조롭게 끝내서 오히려 200만달러를 남긴 것"이라며 웃었다.
"(예산을 넘기지 않는) 대신에 크리에이티브 측면에선 모든 걸 다 제 마음대로 하겠다고 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걸 모두 했고 스튜디오도 그걸 존중해줘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미국에서 제 전작들이 잘 알려져 있잖아요. 그래서 '저놈 맨날 이상한 거 찍는다. 우리가 뭐라 한다고 씨알도 안 먹힌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요, 하하."
아이러니하게도 봉 감독이 '미키 17'의 메가폰을 잡을 기회가 온 것도 그가 "이상한 영화를 많이 찍어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했다. 판권을 가진 워너브러더스가 그간 '옥자' 등 독특한 영화를 선보인 제작사 플랜비엔터테인먼트에 소설을 보여줬고, 플랜비는 자기 색깔이 뚜렷한 연출가이자 협업 경험이 있는 봉 감독에게 이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봉 감독은 "14쪽짜리 요약본이었는데도 완전히 매혹됐다"며 사람이 죽었다가 프린터 같은 기계에서 다시 생산된다는 콘셉트가 특히 흥미로웠다고 했다.
그는 "덥석 하겠다고 수락한 게 2020년이었고, 시나리오를 완성한 건 2021년"이라며 "2022년에 촬영을 모두 마쳤다. 이런 시점들이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7월 발생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에서 착안해 독재자 캐릭터 마셜(마크 러팔로)이 저격당하는 장면을 넣은 게 아니냐는 일각의 추측을 부인한 것이다.
봉 감독은 "미국에서 관련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며 "사건이 있고 재촬영한 게 아니냐는 말도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화 후반부 마셜이 다시 돌아오는 듯한 장면을 언급하며 "바다 건너 있는 어느 나라(미국)의 최근 상황과 비슷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도 언제든지 그런 악몽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상계엄과 쿠데타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 관객들은 시간적 거리를 두고서 보는데도 분하고 원통하고 독재자 모습에 치가 떨리잖아요. 하지만 극장을 나설 땐 '44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지' 생각하면서 로제의 '아파트'를 들으며 집에 오지요. 그런데 갑자기 현실에서 너무 황당한 일(12·3 비상계엄 사태)이 일어났죠. 너무나 큰 집단 트라우마에서 우리가 빨리 치유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미키 17'이 독재자 캐릭터로 주목받긴 했지만, 영화에는 정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계급, 청년 문제, 과학 윤리, 비인간 생명권 등 다양한 화두가 담겨 있다.
특히 마카롱 가게를 열었다가 막대한 빚을 진 뒤 복제인간 프로젝트에 지원한 미키가 위태로운 작업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 문제인 '위험의 외주화'를 떠올리게 한다.
봉 감독은 "화력발전소, 스크린도어, 제빵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돌아가신 사건이 최근 몇 년간 연이어 있지 않았느냐"며 "영화에선 미키 혼자서 그걸 하고 있고 현실에선 A군 뒤에 B군, B군 뒤에 C양이 계속해서 하는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인간 프린팅이 엄청난 SF 판타지 콘셉트인 것 같지만, 사실은 되게 잔혹하고 슬픈 설정입니다. 제가 SF 영화를 찍는 의미도 이런 데 있습니다. 사이 파이(sci-fi, 공상과학)로 보여도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오히려 현실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게 SF 장르라 생각해요. 우리 현재 모습을 반추하게 해주죠."
봉 감독은 '괴물'(2006)부터 '설국열차'(2013), '옥자', '미키 17'에 이르기까지 필모그래피 8편 중 4편을 SF로 채울 만큼 이 장르에 애정이 깊다. 사회 비판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들이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는 공통점도 있다. 특히 '미키 17'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 미키를 보여주면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봉 감독은 "미키라는 한 청년이 온갖 경멸과 수모를 겪고 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을 경험하고도 끝내 파괴되지 않는 모습을 관객과 나누고 싶었다"며 "지금까지 영화에서 인물을 가혹하게 다룬 경우가 많아서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으려 했다"고 털어놨다.
미키를 지탱해주는 힘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봉 감독은 원작의 많은 요소를 바꾸면서도 미키와 여자친구 나샤(나오미 애키)의 로맨스는 그대로 살렸다. 봉 감독이 영화에서 남녀 간 멜로를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둘의 사랑 얘기는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기둥이자 척추 같은 부분"이라며 "책에서 나샤가 미키를 지켜주는 이야기가 나오는 챕터를 읽고서 '아, 결국 이게 핵심이구나' 싶었다"고 회상했다.
할리우드 톱스타 로버트 패틴슨을 비롯해 나오미 애키, 스티븐 연, 마크 러팔로, 토니 콜렛 등 쟁쟁한 배우들과 막대한 제작비, 거기에 봉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을 내세운 '미키 17'은 상반기 최고 흥행 기대작 중 하나다.
봉 감독은 세계적 수준의 거장이면서 천만 영화를 두 편('괴물'·'기생충') 보유할 정도로 대중성도 겸비한 국내 유일의 감독으로 꼽힌다.
그는 "관객들이 2시간가량 정신없이 영화를 보게 하는 것,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절대 휴대전화를 안 꺼내게 하는 것이 저의 목표"라고 했다.
"예전에 다른 감독님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는데 거기서 한 관객이 유튜브를 보는 걸 봤어요. 만약 제 영화가 나오는데 누군가 그렇게 한다면 큰 상처를 입을 것 같아요. 저는 제 영화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캐릭터의 말과 행동에 관객이 막 끌려 가면 좋겠어요. 메시지는 그다음이에요. 저는 재미와 아름다움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