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록 거장' 한대수 "아버지의 360쪽 기록 매일 아침 공원서 읽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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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국내 무대, MBC 24일 방송…김도균·신대철·김목경·손무현과 협연
"부친 자전적 기록 상당한 내용, 글 훌륭해 놀라워"…"옥사나 잃은 상실감 커"
"딸 양호 보며 Z세대 가치관에 자극받아…어리석은 전쟁·가짜 정보 문제"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지난해 6월 미국 뉴욕에서 만난 한대수(77)는 작고한 아버지가 남긴 책 얘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출판은 하지 않고 타자로 찍어 제본해 남긴 360쪽 분량의 기록이었다. 당시 그는 "겁이 나서 읽지 못했다"고 했다.
최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1년여 만에 다시 만난 '포크록의 거장'은 "집에서 홀로 읽는 것이 두려워 매일 아침 공원에서 아버지의 책을 드디어 다 읽었다"고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공연 초청을 받고서 올해 대학생이 된 딸 양호(18)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MBC가 24일 오후 6시 10분 녹화 방송하는 '잇츠 라이브(it's Live) 경기 기후콘서트' 무대였다. 그는 지난 18일 'G4'라 불리는 기타리스트 김도균, 신대철, 김목경, 손무현과 함께 '런 베이비 런'(Run Baby Run)과 대표곡 '물 좀 주소', '하루아침' 등을 들려줬다. 엔딩곡 '행복의 나라'에선 양호가 함께 올라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라는 끝 소절을 노래했다. 2015년 G4와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이후 10년 만의 국내 무대였다. 그는 22일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출연도 앞뒀다.
미국 뉴욕에서 15시간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온 건 언제라도 마지막 무대가 될지 모른다는 마음가짐으로 한 결정이었다. 내내 호탕하던 한대수는 웃음기를 걷고 말했다. "이제 할배도 모든 일에 '디시전 메이킹'(decision making·의사결정) 하는 날이 온 것이 아닌가…."
"오지 오즈번도 76세에 갔잖아요. 웬만한 록스타는 내 나이까지 오지도 못하죠. 내 음악을 들어봤지만 한 번도 (무대를)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실제로 봤다'가 중요하거든. 나도 제프 백이 죽기 전에 그를 봤다는 게 지금도 자랑스럽고 고마워요."
더 연로해져 "결정 능력이 둔해지기 전에" 해야 할 숙제 중 하나가 아버지 인생의 수수께끼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에게 부친의 유품인 책을 건넨 사람은 세상을 떠난 이복 여동생의 딸이었다.
서울대 공대생이던 한대수의 부친 한창석 씨는 핵물리학을 공부하러 미국 유학을 간 뒤 실종됐다. 그가 다시 아버지를 만난 건 17살 고등학생 때다. 핵물리학자였던 아버지는 미국에서 한국어를 잊어버린 채 백인 여성과 재혼해 아홉명의 자녀와 살고 있었다. 한대수는 롱아일랜드에서 인쇄업을 하는 아버지의 가정에서 청소년기 일부를 보냈다.
그는 책을 읽고서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느냐고 묻자 "지금 말하긴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그는 "한씨 집안과 내 어머니 집안에도 책의 존재를 알려줬다"며 "주위에서 출판하자고 관심을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있는데 가족들도 읽어봐야 하니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아버지는 본인이 화자가 아니라 '챙'이라는 제3자를 내세워 자전적인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한대수는 "상당한 내용이 있는데, 아버지의 전처, 즉 나의 엄마 얘기가 많이 나온다"며 "내가 17살에 아버지를 만났는데, 나를 만나고서의 스토리까진 가지 않아서 내 얘긴 별로 없었다. 세심하게 정리한 것이 놀라웠고 글이 훌륭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손에 자라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도 컸지만, 그는 지난해 5월 32년간 함께 한 몽골계 러시아인 아내 옥사나 알페로바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공허의 태풍' 한가운데서 살았다.
그는 "아버지의 부재는 습관이었으니 그에 대한 그리움은 추상적이었다"며 "옥사나는 30년 넘게 같이 살았으니 그녀가 없는 건 습관이 안 된다. 이 할배는 상처투성이"라고 애써 유쾌하게 웃음 지어 보였다.
2016년부터 10년 남짓 뉴욕에 살고 있는 그는 퀸스 자택에 남은 옥사나의 유품을 지금도 정리하고 있다.
그는 '싱글 대디'로 산 1년을 돌아보며 "결혼 생활을 하며 여러 문제가 있어도 살아있다면 융화되고 화합할 것이란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냐"라며 "그런 희망이 없다는 건 엄청난 상실감이다. 무엇보다도 모녀는 엄청난 관계인데, 양호에게 엄마라는 영혼의 다리가 끊어진 것 같아 슬프다"고 했다.
양호는 올해 뉴욕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한대수는 옆에 나란히 앉은 딸을 바라보며 "양호가 대학에 들어가서 고맙다"고 했다. 그가 뉴욕으로 이주할 때 목표도 환갑에 얻은 딸의 대학 진학이었다. 한국에선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자신처럼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양호가 비교적 자급자족하며 독립정신이 강해요. 양호 같은 Z세대는 나의 젊은 날과 완전히 다르죠. 물질적인 재산보다는 화폐가 더 의미 있고, 심플리스트로 살면서 여행을 즐겨요. 양호한테 집에 있는 기타, 카메라, 책을 가지라 하니 '왓(what)?'이라고 해요.(웃음) 우리 땐 할아버지 바이올린, LP를 서로 가지려 했거든. 자기 세계가 뚜렷한 건 존중해줘야죠. 나도 자극받고 있어요."
한대수는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이 "인생의 전환점이자 모든 걸 심각하게 생각하는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롱아일랜드 아버지 집에서 1집 음악을 만들던 시기를 떠올리며 "만약에 음악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라며 "고통을 음악으로 표현했더니 팬들이 생겨 위로가 됐다. '물은 사랑,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나뿐이 아니네' 하며 연결되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곡을 쓰는 조건에는 가족의 아픔, 세계적 관념 등 인생에 대한 굉장한 회의가 있어야 해요. 싱어송라이터든 베토벤 같은 클래식 음악가든 근본에는 슬픔의 강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죠. 과거 옥사나에 대한 곡을 여럿 썼는데, 지금의 상실은 너무 큰 주제여서 곡이 나오지 않네요."
평소 세상 변화에 순발력 있게 교감하고 사회 문제에 기탄없이 목소리를 내는 한대수는 디지털 시대 속 가짜 정보, 반전(反戰) 등에 대한 생각도 꺼내놓았다. 그는 옥사나의 장례식에서도 "평화"를 외쳤다.
한대수는 "우크라이나인 피도 섞인 옥사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괴로워했다"며 "내 젊은 날에도 베트남전이 있었는데 이 어처구니없고 어리석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군림하고 독재하고 싶어 하는 자아가 끝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이 내 손안에 있는 시대에 가짜 정보가 넘쳐나는 것도 큰 문제"라며 "인터넷에서 나에 대한 정보만 읽어도 잘못된 게 많아서 혼자 웃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게 진리처럼 돼 있다"고 꼬집었다.